사람의 아들 붓다 1, 2

디팩 초프라(Deepak Chopra) 저 | 진우기 역 | 푸르메 | 2007.05.11

붓다라 불리우는 싯타르따, 그는 누구인가? 신일까 인간일까?
붓다, 스스로가 ‘신이 아니라 깨달은 사람, 진리를 아는 자’라고 분명하게 말을 하였지만 오늘날 대다수 우리는 신으로 숭배하는 그,

철학자이며 의사인 인도사람 디펙 초프라가 지은 장편소설 ‘사람의 아들 붓다’를 만났다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다.
우연히 인터넷 검색 중에 발견한 순간 한 종교의 교조로 그리고 신으로 추앙받는 인류 사상 최초로 진리를 깨닫은 사람을 인간의 관점에서 그것도 찬양을 위한 전기가 아닌 소설로 만났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특히 2500년이라는 긴 시간의 간격이 존재하지만 작가가 붓다와 같은 인도인이라 다른 사람보다는 더 가까운 정서로 이해하고 저술된 저술이라 인간 붓다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책을 열었다.

붓다, 그가 비록 깨달은 자이기는 하지만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같은 인간이기에 우리가 살며 느끼는 모든 것은 그도 느끼고 괴로워했으리라.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그도 성공을 바라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기성세대의 것들에 의혹을 품는 현대 젊은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이 책은 모두 3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싯타르타로서 왕자의 삶을 산 세월을 그렸고
2부에서는 수행자 고타마의 고난을 그렸다.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는 깨달은 붓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부 왕자 싯타르타에서 작가는 태어나면서 바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다거나 동서남북에 있는 성문을 나가 인간의 생사병사의 고통을 차례로 보았다는 등의 전설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한 붓다의 이야기를 하면서 작가는 싯타르타의 아버지인 숫도다나의 전쟁 장면으로 글을 시작한다.

이 시기의 싯타르타는 자신의 탄생으로 인해 죽은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전륜성왕의 운명으로 태어났다는 예언서로 인해 부왕으로부터 나쁜 것을 보지 못하게 성밖으로는 나가지 못하도록 조치되어 연금과도 같이 갇힌 지내는 날들, 그리고 왕자로서의 임무로 인한 갈등으로 번뇌하는 작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궁중시녀 수자타에 아름다움에 눈을 빼앗기고, 강력한 왕으로 만들려는 부왕의 뜻에 순종하며 무술을 수련하고 평생의 훼방자 데바닷타와 목숨을 건 결투하는 왕자 싯타르타를 묘사함으로서 우리들로 하여금 좀 더 친근한 인간 싯타르타를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러는 가운데 악마 마라와의 대화를 통해, 성자 아시다의 대면을 통해 명상하고 고뇌하면서 성장하는 모습 속에서 깨달음의 길을 가야하는 그의 운명의 씨앗들을 볼 수 있다.

2부 수행자 고타마에서 작가는 왕자 싯타르타의 신분을 버리고 고단한 수행자 고타마의 삶을 이야기 한다. 붓다의 전기에서 이미 알고 있듯 두 명의 스승을 거치고 난 후 홀로 깨닫는 과정이 그려지는데 가족과 신분 모든 것을 뒤로하고 출가하는 과정의 갈등이 겹쳐 묘사되면서 사람의 아들로서의 고뇌의 모습을 함께 보여 주면서 그의 고행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수행 의지와 다양한 수행을 통해 죽음 후에 얻는 즐거움 보다는 살아있는 현실에서의 즐거움과 행복의 의미를 강조한다.

소설에서 수행자 고타마는 천신들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천국의 쾌락이란 죽은 후에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저주와도 같다. 살아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므로’ 라고.

그리고 고행을 통해 고타마는 삶에 있어 부정할 수 없는 고통은 싸워서 이겨 극복 것이 아니고 고통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드림으로서 초월하는 것임을 알게 하고 있다.

3부 붓다에서 작가는 붓다의 실제 행적과는 다르게 깨달은 후 첫 제자들인 다섯 비구를 가르치는 모습과 바로 자신의 고향 카필라바투스로 가서 부왕과 아들 라훌라 그리고 부인 야소다라를 만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부인 야소다라와 아름답게 포옹하는 장면이나 부왕을 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통해 작가는 보다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붓다의 모습을 감동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데바닷다와 부왕 숫도다나의 전쟁에 개입하는 과정을 기적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기적이기 보다는 모든 두려움에서 초월한 붓다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분쟁을 해소하는 과정도 붓다는 자신의 초인적인 능력으로 현실을 무시하거나 무리하게 해결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풀어감으로서 붓다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붓다의 손길 한번으로 인간의 고통을 소멸 시킬 수는 있지만 세상 모든 사람에게 손길이 미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렇게 고통을 소멸시키다 해도 스스로 노력하여 극복한 고통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

붓다는 다섯 제자에게 꽃이 핀 나무를 가리키며
‘다르마는 이렇게 아름답고 쉬운 것이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에게 고통으로부터 최대한 빨리 나오는 법을 보여 주어야 한다. 사람들이 신의 저주를 받았거나 신의 사랑을 받는다고 몇 년이고 논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 좋은 카르마, 나쁜 카르마나 제례나 희생이나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게’고 하였다.
이 말은 오늘날 수행자라기 보다는 하나의 직업으로 전락한 승려들이 붓다를 대신하여 불법을 전하고 제자로서 재가 중생에게 어떠한 자세로 다가가 어떻게 설법해야 하는가에 대해 반성하게 한다.

마지막에 작가는 다음과 같은 붓다의 말로 소설을 마무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상관없어, 열정의 불꽃은 곧 타버리고 말지. 그런 다음 남은 재를 조금 더 파보면 보석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보석은 사실 자네 안에 내내 있었던 거라네. 그것은 자네 것이고 자네는 그것을 영원히 간직할 걸세. 그 보석이 바로 붓다인 게야’

2500년 전에 살다 가신 붓다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우리가 바로 붓다임을 붓다를 대신하여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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