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버거, 안톤 지더벨트의 ‘의심에 대한 옹호’

우리는 의심이란 단어에 대해 많은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의심이 많은 사람을 싫어하고 의심에 대해 의혹을 갖는다. 잘 믿어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뭔가 의심스러운 눈치를 보이면 기피하려 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의심에 대해 의심스러운 사람에 대해 우리는 경계를 하지만 믿음을 강조하고 믿어주는 사람에게 쉽게 믿음을 준다.

일상에서 믿음 또는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믿고 싶어 하고 자신이 인정하는 가치에 대해 무조건 믿는다. 또한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하기 위해 믿음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살면서 그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닫는 순간에도 우리는 또 다시 다른 무언가에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세계적인 사회학자인 피터 버거와 안톤 지더벨트는 이 책에서 맹목적인 믿음의 폭력성과 위험을 지적하고 있다. 무수한 선택이 끝도 없이 늘어진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제 중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의심’이라고 말한다.

믿음이 상실된 사회라고 푸념하고 인간개개인과 집단의 신뢰 회복을 부르짖어도 모자란 형국에 ‘의심’을 옹호한다니 무슨 정신 나간 소린가 할 수 있겠지만 피터 버거와 안톤 지더벨트가 말하는 의심은 결단을 내리기 전에 한번 더 고민하고 숙고하는 신중함, 즉 진리를 찾기 위해 선행되는 지적인 활동임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 종교에서의 경우 의심은 죄가 되어 믿음의 부족은 중죄가 되고 신을 배반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종교에서는 흔히 ‘의심하지 말라’며 이해되지 않는 교리에 대해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진리의 목소리는 의심 섞인 낮은 목소리’라는 파스칼을 말을 인용하면서 ‘진리란 허위 위에 서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의심과 불확실성은 지식과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임을 역설하며 의심은 믿음의 준비단계라고 주장한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은 의심받아야 마땅하다.’라고 외쳤으며 소크라테스는 학생들과의 논쟁에서 질문을 통해 선입견과 유행을 따르는 믿음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의 목표는 어떤 신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신념과 선입견, 편견을 지워 없애서 정신을 깨끗이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진지하고 일관성 있는 의심을 통해 우상을 버리고 진정한 배움을 얻을 수 있고 우리의 정신을 채우고 있는 오류를 제거하고 현실을 똑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심이 섣부른 결정과 편견의 완충 역할을 하지만 지나친 의심으로 결정과 행동을 대책없이 미루다 보면 커다란 재앙을 빚을 수 있음을 또한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 의심은 그것을 적정수준으로 묶어둘 제대로 된 합리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그 대안을 작가는 중도의 가치를 역설한다. 이 책에서 결론으로 의심과 믿음의 양 극단의 해결책으로 언급되는 중도를 읽다보면 우리 동양인에게는 붓다와 공자를 통해 너무도 익숙한 것으로 그 내용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동양에서는 이미 일반인들에게 조차 익숙한 중도의 개념을 통해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외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어째든 종교와 정치 심지어 과학에서 조차 극단적으로 대립하며 저마다의 진리로 믿음을 강조하는 이 어지러운 오늘, 과연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 혼란해 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믿음이 아니라 의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관념과 전통,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 잡혀 있는 우리들에게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나침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피터 버거, 안톤 지더벨트 지음 | 함규진 옮김 | 출판사 산책자 | 2010.0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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