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 아제 바라아제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지느니라.”
반야심경은 처음 이 두 줄에서 경이 하고자 하는 말은 다 하였다. 나머지는 이 두 줄의 내용을 친절하게 설명하며 이해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관자재보살이 ‘오온이 공한 것을 알고 모든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온이 공한 것을 깨달아라. 그러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고 실천하기만 하면 세속의 온갖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제발 너희도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알아라.’ 하고 이 반야심경은 일깨우고 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지느니라.”

스스로를 꽤 뚫어 볼 수 있는 관자재보살이 고통이 없는 피안으로 갈 수 있는 방법, 다시 말해 지혜가 무엇인가를 골똘히 살펴보니 오온은 흐름의 과정에서 생겨는 현상일 뿐 특별한 그 무엇인가가 아님을 알고 스스로 그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고 욕심과 욕망을 놓아 버렸더니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더라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눈을 통해 세상의 대부분을 볼 수 있지만 자신만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관자재보살은 스스로가 어떤 상태인가를 살펴 본 것이다. 물론 자신만의 문제를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고통으로 부터 구원하고자 인간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던 것이다.

관자재보살이 유체이탈을 하듯 하여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관찰해 보니 ‘몸과 마음이 공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내려놓으니 고통에서 벗어나더라. 그러니 너희도 그렇게 하여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이 무엇인가? 공은 연기이기에 무아이고 무상이기에 또한 공이다. 공이므로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으며, 연기이므로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무아이므로 분별할 것도 깨달을 것도 없고 무상이므로 늙음도 죽음도 없고 죽음이 다함도 없다는 것이다.

빈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 항상 변하는 것이기에 규정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연기에 의한 인연 작용의 현상이기 때문에 시작도 끝도 없고 실체나 주체가 없다. 그냥 그렇게 얽히고 설키어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있기도 했다가 없기도 하는 그래서 공이라고 한다.

이렇듯 내 몸과 마음의 상태는 여러가지 인과작용에 의한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일 뿐이다. 나는 주체자로서의 내가 아니라 현상의 결과로서 나이기에 절대 불변의 영원한 존재가 아니다. 내가 절대불변의 어떤 존재가 아니라 항상 변화하는 존재이므로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헛된 안간힘을 쓸 필요도 없고 더 나은 무엇인가가 되려고 발부둥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안간힘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더 나은 무언가를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나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무리를 하면서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억지는 부자연스러운 것이기에 고통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 세상의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유별나고 선택된 존재가 아니고, 피고 지는 꽃처럼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처럼, 쉼 없이 흘려가는 강물처럼, 밀려왔다 쓸려가는 파도처럼, 그렇게 보여 지는 현상일 뿐이다.

우리의 삶에 가장 확실한 것은 지금 여기이며, 바라는 바가 없이 이 순간 스스로에게 충실하고 있다면 어제에 대한 아쉬움도 없고 내일에 대한 불안을 느낄 겨를도 없으므로 고통도 없다.

이처럼 모든 주관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의 상황에 스스로가 완전히 녹아든 물아일체의 상태로 자신을 맡기면 모든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관자재보살처럼 자신의 내면을 객관적으로 고요히 관찰하며 스스로를 확인하고 반성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식조차 없이 습관처럼 매일매일을 분주하게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공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이유도 없고 더 숭고한 것을 지향할 필요가 없을지라도, 잠시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지금 이순간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살펴볼 성찰의 여유는 있어야 한다.

적어도 자신이 타고 있는 차가 어떤 상태의 것인지,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왜 타고 있는지는 자각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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