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의 달마강의

달마는 6세기 초 인도에서 화북으로 건너와 낙양을 중심으로 활동한 중국 선종(禪宗)의 창시자이다.
달마는 그의 인도 이름은 보디 다르마(Bodhi-dharma)로 남인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성을 세테이리라고 했다. 이와 달리 달마는 인도가 아닌 페르시아 출신이며, ‘세테이리’라는 것은 성이 아니라 인도 4성 계급 중에 크샤트리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는 현학적인 철학체계에 갇힌 그 시대의 불교에서 벗어나 본래의 청정한 자성에 눈떠 바로 성불하라는 설법을 평이한 구어로 말한 종교 운동가였다. 많은 민중들은 그의 사상에 열광했다.
8세기부터 9세기에 걸친 급격한 사회변혁 시대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새 불교의 이상을 달마에게 구하였다. 민중들은 논리적이고 교학적인 불교보다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불교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오쇼는 인도의 신비가, 구루 및 철학자이다.
1960년대 이후로 아차리아 라즈니쉬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으며, 1989년에 ‘오쇼’라는 이름을 새로 택하여 그 뒤로는 주로 오쇼 라즈니쉬로 불린다. 오쇼는 철학 교수로서 인도를 돌아다니며 대중을 상대로 강연했으며, 사회주의와 마하트마 간디 및 기성 종교에 반대하고 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취했다. 1970년부터 오쇼는 제자를 받으며 정신 지도자로서의 삶을 시작했으며, 그 뒤로 세계의 종교적 경전이나 신비가 및 철학자들의 글을 재해석했다.

오쇼의 달마 강의는 우리나라에서 1994년에 발간된 책으로 인도 푸나의 장자 오디토리엄에서 라즈니쉬 국제 신비주의 대학을 대상으로 행한 강의를 정리한 것이다. 달마의 사상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오쇼만의 독특한 깨달음을 느낄 수 있다. 종교나 이념, 국경과 연륜에 관계없이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강의다.

이번 리뷰는 감상을 옮겨 적기 보다는 책에서 오쇼의 강의를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더 이해가 쉬울 것 같다고 생각하여 책 내용의 일부를 그대로 옮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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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더없이 중요한 의미가 담긴 말이다.
이 말은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 가운데 하나이다,
즉, 누구도 그대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조차도 구원할 수 없었다.

자이나교와 불교는 누가 누구를 구원한다는 생각 자체를 부정하는 유일한 두 종교이다.

하지만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대는 그대가 알든 모르든 그대 역시 부처라고 말한다.
그러니 어떻게 다른 사람이 그대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부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대를 깨어나게 하는 것이 전부이다.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 이 말은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부처로 하여금 부처를 숭배하게 하지 말라.

그것을 숭배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는 자는 숭배하지 않는다.
그는 살아가는 삶 자체가 하나의 숭배이다.

그리고 잊지마라. 깨달음이란 외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그대 안에 있다. 그대는 단지 잠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

 

하찮은인간, 호모라피엔스

원제는 “straw dogs”로,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여긴다)을 인용한 것이다. ‘지푸라기 개 Straw Dags’는 고대 중국인들이 제사를 지낼 때 신에게 바치기 위해 만든 희생물이다. 이 개는 제사가 끝날 때까지는 최고의 예우를 받았지만 제사가 끝나면 내팽개쳐졌다.

철저히 반휴머니즘의 편에서 말하는 존 그레이. 그에게 인간이란 변화하는 환경과 무작위로 상호작용하는 유전자 조합에 불과하다.“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에서 그는 ‘자유로우며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인간에 대한 오래된 가정은 편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존 그레이는 서구 문명의 핵심에 자리한 휴머니즘을 인간 ‘종’ 중심주의를 지탱하는 원천으로 보고 휴머니즘의 핵심 관념인 “진보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낱낱이 파헤친다. 그 과정에서 인간과 세계에 관한 우리의 편견과 고정관념 모두가 비판의 칼날을 피해 가지 못한다.

존 그레이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식과 발명은 향상될 수도 있겠지만 윤리는 대체로 그대로일 터였으며, 역사란 궁극의 의미를 갖지 않은 채 흘러가는 일련의 순환 고정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이라는 성경의 신화는 금지된 진리를 담고 있다. 지식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지 않는다는 진리 말이다.”

“삶의 목적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인간은 세상을 구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절망할 일은 아니다. 세상은 구원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일상생활에서 인간들은 득실을 계산하며 살려고 애쓴다. 과학이 합리적인 세계에 이성과 합리성을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은 비정상적인 환상이다.

자크 모노는 생명이란 사물의 본성에서 연역해 낼 수 없는 요행의 결과지만 일단 생명이 생겨나면 무작위적 변형들의 자연선택 과정에 따라 진화한다고 보았다. 다른 동물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간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는 점에서 모노가 옳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우연적 작용의 결과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윈의 이론은 우리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동물이며, 우리의 운명이나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의 운명이나 다를 바 없다는 자연주의의 진리를 보여 준다. 동물들은 태어나 짝을 찾고 음식을 구하고 죽는다. 그게 다다.

기독교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창조하였고 자유의지를 가진다고 했다. 또한 휴머니즘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결정권을 가진 존재라고 한다. 어느 쪽이건,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크게 다르다.
그러나 휴머니즘을 처음 비판한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 동물과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이 실제로 경험한 것은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신체적인 필요에 의해 추동된 것이다. 자신을 잘 들여다보면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존 그레이는 또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택한 삶’이라는 이상은 우리가 실제 사는 방식과 맞지 않다. 우리는 삶의 결정자가 아니다. 우리에게 깊은 흔적을 남기는 사건들은 그 중 일보조차도 우리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태어난 장소와 시간, 부모, 모국어 등 이 모두는 우연이지 선택이 아니다. 우리 각자의 삶은 우연이 만들어 내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따라서 가장 자유로운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이유들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결코 없는 사람이다. 선택한 대로 살기보다는 반드시 그렇게 되어가는 이치대로 산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야생의 동물처럼, 혹은 기계처럼,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존 그레이는 책에 중국 전국시대의 철학자 열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여 이를 보충하여 강조하고 있다.
“가장 고결한 인간은 쉬고 있을 때는 죽은 자와 같고, 움직이고 있을 때는 기계와 같다. 그는 자신이 왜 쉬는지, 왜 쉬지 않는지를 모르고, 왜 움직이는지, 왜 움직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다면, 인간의 여러 본능들이 서로 상충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안전을 갈구하면서 쉽게 지루해 하고, 평화를 사랑하지만 폭력을 열망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욕구를 다 충족할 수 있는 삶은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자기기만이라는 선물 덕분에 자기 본성을 모른 채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는 약탈하는 사람을 뜻하며, 현생 인류를 약탈자로 비꼰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존재 이유도 깨닫지 못하면서 다른 동물과는 다르다는 우월감에는 취해 주변의 모든 자연을 약탈하고 파괴하는 인간의 몰염치를 비판하면서 이러한 행위들이 결국에는 인간 스스로가 파멸의 길을 빠르게 달려가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저자 존 그레이 | 역자 김승진 | 2010.08.31
원제 Straw dogs : thoughts on humans and other animals

오쇼의 ‘금강경’

이 책의 저자 오쇼는 붓다, 간디, 네루 등과 더불어 인도의 운명을 바꾼 열 명의 인물 중의 하나 사람으로 선정되었는데 미국의 작가 탐 로빈스이 예수 이후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다.

20세기 가장 위험한 인물인 오쇼가 붓다와 금강경의 말하고 있는 책이다.

‘여시아문’, ‘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시작하는 금강경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이다.

오쇼는 붓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붓다는 아무 이념도 없다. 그는 아무런 이념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상마저 믿지 않는다. 오직 억압도 없고 이상도 없는 삶의 길을 제시한다.

붓다는 니르바나를 하나의 이상으로서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가두는 대신 해방시킨다.
어떤 목적을 위한 삶이나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 삶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해지는 삶을 가르친다. 때문에 내세나 저 세상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을 가르친다.

붓다에게는 사소한 일도 없고 큰 일도 없다.
그는 밥그릇을 들 때에도 신을 대하듯이 정중하게 대한다.  가사를 걸치거나 옷을 입을 때도 그는 매우 주의 깊다. 그는 전적으로 깨어 있다. 그는 기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오쇼는 다음과 같이 금강경을 강론하고 있다.

종교는 뗏목과 같다고 말한다, 종교는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임의적인 수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신과 세상 또한 둘이 아니다, 창조자와 창조물이 하나이다,

사회는 억눌린 마음을 창조했다. 사람들에게 성적인 쾌락을 허용하면 그들을 노예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즐거움에 넘치는 사람을 노예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회의 계략이다. 오직 슬픈 사람들만이 노예가 될 수 있다. 즐거움에 넘치는 사람은 자유인이다. 그는 스스로 독립하여 제 발로 선다.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경쟁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삶이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여기’에서 기쁨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가고 또 가고 또 간다. 그리고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언제나 가는 중일 뿐이다.

기쁨을 아는 사람은 ‘여기’에 존재한다. 그가 서울로 갈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무엇 때문에? 그는 지금 여기에서 완벽하게 행복하다. 그는 욕구(need)를 갖지만 욕망(desire)은 없다. 욕구는 만족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결코 성취될 수 없다. 욕구는 자연적인 것이지만 욕망은 변태적이다.

‘나’라는 단어는 실용적인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이 단어에 상응하는 실체는 없다.
붓다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직 구성요소들만 있을 뿐이다,  인간은 철저히 공이다.

삶을 하나의 과정이기에 삶은 고정된 물체가 아니다. 삶은 끊임없는 흐름이다.
우리의 언어에서 모든 명사는 버려야 한다고 붓다는 말한다. 오직 동사만의 진실이다.

강(river)은 진실이 아니다. ‘흐른다.(rivering)’가 진실이다. 나무(tree)는 진실이 아니다. ‘자란다.(treeing)’가 진실이다. 사랑(love)도 틀린 말이다, ‘사랑한다.(living)’가 맞는 말이다. 삶은 명사가 아니라 오직 동사로 이루어진다.

붓다는 영혼의 초월적인 힘도 부정한다. 거기에 아무 초월적인 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고 …

붓다를 여래라고도 한다.  ‘여래의 의미는 ‘그렇게 오고 그렇게 가는 자’로 해석된다. 바람처럼 오고 바람처럼 가는 자.

바람은 아무 이유없이 불어온다. 바람은 자기만의 동기를 갖고 있지 않다, 바람은 아무 목적도 없다. 바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간다, 그냥 그렇게 왔다가 그냥 그렇게 간다. 바람은 어느 곳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오고 갈 뿐이다.

붓다는 바람과 같다. 그냥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간다.
모든 것이 아름다운 축복이다. 오는 것도 축복이며 가는 것도 축복이다.  육체 안에 있는 것도 축복이며 육체를 떠나는 것도 축복이다.

오쇼는 우리의 삶도 그렇게 바람처럼 왔다가 간, 붓다의 그 삶과 다르지 않다고 이 책에서 강론하고 있다.

금강경 (벼락처럼 단번에 자르는 지혜의 완성)
오쇼 지음 | 손민규 옮김 | 태일출판사 | 2011년 09월 05일 출간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저 : 신용산 ㅣ 출판사 : 한걸음더 ㅣ 발행일 : 2008년 10월01일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이 책은 초기경전의 시각에서 금강경을 분석하고 있다.

금강경은 붓다의 열반 후 500여년이 지난 후 불교 사상가들에 의해 저작된 것으로 금강경은 한국불교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이 근본지침으로 삼는 소의경전(所依經典)이다. 붓다의 깨우침과 가르침을 가장 체계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금강경은 불교신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읽고 싶어 하는 대표적인 불교경전이다.

금강경은 기존의 교단에서 설명하였던 모든 수행론을 팽개치고 단도직입하여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는 최상근기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 이러한 경전이 원래 붓다의 가르침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은 불교의 경전이 모두 붓다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붓다, 그는 현실의 문제에 대해 고민한 철학자요 사상가였으며, 자신의 깨달음을 수행으로 증명해 낸 참사람이었다. 붓다는 자신은 물론 그 어떤 전지전능한 신도 현상의 법을 만들지 않았고 만들 수도 없다고 단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백 년이 지나기도 전에 그는 그의 추종가자들에 의해 이미 신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현상을 통찰한 인간으로 남아 있기를 원했던 붓다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그의 바람과 정반대의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이 책은 붓다 사후 붓다의 가르침과는 달리 붓다가 왜 절대자가 되었고 수행을 강조하였던 그의 가르침이 신앙으로 변하게 되었는지를 금강경의 해석을 통해 이야기 하고 있다.

붓다는 ‘인간이 누군가의 피조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함으로서 세상에 존재하며 존재하는 나 역시 여러 조건에 의해 형성된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고 하였다. 붓다의 가르침은 모두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붓다 열반 2,500여 년.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불교는 대단한 종교 세력을 이루었지만, 근원적인 괴로움을 깨치려 몸부림쳤던 인간, 그리하여 깨달음을 이룬 위대한 스승이었던 붓다는 그저 신화적 존재로 추앙받으며 저 법당 안에 권위의 상징으로, 우리는 구원해 줄 신으로 모셔져 있다.

금강경 저술에 참가하였던 대승경전의 편집자들은 시대의 변화를 읽으면서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토대로 자신들의 새로운 사상을 구축하면서 대중들 곁으로 다가갔다. 물론 대승경전이 인간 부처님을 절대적인 초원자로 격상시킴으로써 그분의 법을 근본부터 훼손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책의 곳곳에서 지적하고 있는 붓다의 원래 가르침과 금강경이 말하는 가르침을 비교하면서 금강경이 주고자 하는 가르침이 무엇인가 보아야 하며 곳곳에서 눈에 띄는 바른 법에서 어긋나는 가르침의 수용여부는 경을 읽는 이의 안목과 신앙심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인 절대자를 필요로 한다는 관점에서 대승불교가 붓다를 역사적인 인물에서 신으로 격상시킬 수 밖에 없으며 이 과정에서 불보살의 창조해 중생의 귀의처가 되도록 하였다고 변론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어쩌면 저자가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는 붓다의 말씀을 책의 제목으로 삼은 이유가해탈에 도움이 되는 않는 논쟁은 모두 쓸데없는 짓이라고 한 붓다의 말씀을 빌어 금강경의 안고 있는 의미를 옹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글을 읽으면서 성열스님이 그의 저서 ‘붓다 다르마’에서 ‘만약 고따마 붓다의 견해와 배치된다면 그것은 불교라고 할 수가 없다.’라고 한 글의 의미가 계속 함께 했다.

어째던 이 책을 통해 오늘 우리가 믿고 있는 불교의 의미와 우리나라의 조계종이 소의경전으로 금강경을 삼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 책이 독자에게 주는 선물임에 틀림이 없다.

“붓다 브레인”-릭 핸슨, 리차드 멘디우스 공저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뇌의 관리 또는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더욱 충만하고 행복한 것으로 만드는 방법에 관해 기술한 책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뇌 과학자들은 외부 충격에 의하지 않는 한 뇌는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그리고 마음도 뇌의 활동에 의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최근 정밀한 뇌 스캔이 가능해지면서 이런 가설은 무너졌다. 뇌도 평생에 걸쳐 변화한다는 혁명적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학습하고 조절하고 훈련하는 것으로 뇌를 바꿀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신경심리학과 명상 분야의 권위자인 릭 핸슨과 신경학자이며 대학에서 의학을 가르치고 있는  리처드 멘디우스의 공동저작인 『붓다 브레인(Buddha’s Brain)』에서 마음 훈련을 통한 뇌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연민, 공감 등 일상에서의 변화에 따라 실제 뇌가 어떻게 변하는지 과학적인 내용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 놓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과학적인 논리에 멈추지 않고 ‘행복, 사랑, 지혜를 통해 실제적인 뇌의 질적 변화를 꿈꾸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들이 명상수련은 수천 년간 마음과 뇌를 탐구해 왔으며 마음과 뇌를 평온하게 하여마음속의 고요한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정교한 방법으로 마음과 뇌를 변화시킨다고 주장하며 뇌의 훈련 또는 조절 방법으로 명상을 강력하게 내세우면서 그 중에서도 특히 불교의 수련법에 주목하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기를 “우리가 외부에 실재한다고 보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실은 우리 뇌 속에서 컴퓨터 그래픽처럼 그려낸 영화 장면처럼 처리된 정보이다. 후두엽으로 보내진 정보 중 극히 일부만이 직접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시각정보이다. 나머지는 뇌 내부의 기억 저장고와 인지-처리 모듈에서 오는 정보이다. 우리의 뇌는 세계를 시뮬레이션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실재와 매우 유사한 가상현실인 셈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자아에 대해서도 “마음에 일어나는 여타의 심상에 비해 특별할 것도 없고 다를 것도 없는 정신적 패턴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뇌는 다양한 자기화와 주관성 요소들을 묶어서 균일하고 일관되며 연속적인 자아의 환상을 만들어 낸다. 자아는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때문에 우리는 명상을 통해 어느 순간에도 더 명철하게 사고할 수 있고, 이성적인 사고과정에 따뜻하고 정서적인 지능을 불어 넣을 수도 있다며 이러한 ‘마음챙김’을 통해 현재 접하고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해 완전히 집중하되, 판단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실재하는 신체감각에 집중함으로써 평상심을 유지하라고 일러주고 있다.

‘붓다브레인’은 과학과 불교적 수련 방법을 통해 우리의 뇌를 조절하여 충만한 인간관계, 행복한 일상을 살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뇌를 고요히 하고 자비로운 뇌로 바꾸어 행복과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우리의 뇌를 재조직하는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을 알려 주고 있다.

 

릭 핸슨, 리차드 멘디우스 공저 / 장현갑, 장주영 공역 / 불광출판사 2011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