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야 하는 이유

한자어의 인간은 순수 우리말로는 ‘사람’이다. ‘사람’의 어원은 ‘살다’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삶’과 ‘앎의 합성어라는 설이 있다.

‘살다’가 어원인 경우는 살아가는 자체에 의미를 둔 것이고, ‘삶’과 ‘앎’의 합성어인 경우는 ‘살아가는 방법을 아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의 사고 속에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감에는 아는 것, 즉 지혜가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살다’는 또 무슨 의미인가? 또한 ‘삶’에서 ‘앎’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살다’는 말 속에는 ‘죽음’이 공존하고 있으며 ‘앎’이란 살아가는 행위 속에는 ‘생노병사’가 필연적으로 함께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살아가는 것은 병들고 늙어가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고 언제가는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에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죽기 때문에 살아내는 것에 충실해야 한다.

사람은 다른 생명체와 다르지 않는 존재이다. 사람만이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면 다른 생명체가 살아가는 모습에서 사람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모든 생명체의 존재 이유는 생존이다. 자연 법칙의 기본이 생존에 있고 진화의 이유와 과정이 생존에 근거하고 있다. 번식 또한 생존을 위한 한 방법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 이유 역시 생존인 것이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존재의 이유고 삶의 목적인 것이다. 이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살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이기 때문에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가족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슬픔에, 모든 재산을 잃은 상실감에, 꿈을 이루지 못한 실패의 허탈함에, 살아갈 이유를 없어졌다고 의욕을 상실하거나 생을 포기하는 행위는 비겁하고 무책임하며 자연의 질서에 역행하는 행위인 것이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만이 책임감 있고 당당하게 자신에 본능에 충실한 것이며 존재의 이유를 충실히 실천하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깨달은 자인 ‘붓다’를 다른 표현으로 ‘여래’라 부른다. ‘여래’란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간 사람’이라는 뜻이다. 깨달은 사람 ‘붓다’를 ‘여래’라 부르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냥 태어났고 다른 모든 생명과 다르지 않게 그렇게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어떤 이들은 불교를 허무적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허무적일 수도 있다. 사람이 태어난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고 살아가는 것에 목적도 특별한 무엇이 없다면 무엇에 의지하여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다. 그냥 대충 그럭저럭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허무감에 빠지는 것도 일견 타당하다.

살아야 하는 희망의 끈이 없이는 살아내기가 너무도 힘들기 때문에 자신이 사는 목적이 분명히 있을거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동안 그 희망의 끈으로 열심히 노력하며, 우리의 삶이 특별하고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으며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 알 수 없기에 불안하고 두렵지만 내일은 분명 약속된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 믿음을 갖고 오늘의 고통을 감내해 내고 있는 것이다.

길 위의 철학자라 불리우는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호퍼는 어릴 때 시력을 잃었다가 15살에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행상과 시간제 웨이터, 부두노동자 등으로 전전하면서 독학으로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쓴 고난의 삶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던 철학자다. 1983년에 타계한 이 길 위의 철학자는 “희망은 자기기만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희망을 무시할 만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희망하는 마음에는 어딘가에 의지하지 않고는 현재를 지탱해 내지 못하는 나약함을 스스로 위로하고 격려하려는 정서적 위장이라는 것이다.

고단한 오늘로 하여 사람들은 오늘에 만족하지 못하고 내일이 불안하지만 그래도 더 나아질 거라 기대하며 오늘을 소모한다. 약속된 내일은 충실한 오늘로 해서 보장된다는 사실을 잊어 버리고 오늘을 희생한다. 오늘은 내일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으며 확실한 보장을 위해 어리석게도 음모와 패악 뿐인 헛된 무리수로 오늘을 낭비하고 있다. 그렇게 또다른 오늘로 다가온 내일은 다시 내일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희생하고 언제나 내일은 불안하고 오늘은 여전히 고단한 희생으로 소모되고 있다. 사람들은 희망의 내일을 기대하지만 내일은 언제나 저만치 떨어져 내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붓다는 다른 무엇도 아닌 ‘지금, 여기’ 현재에 충실하라고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알 수 없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충실하고 열중하라는 것이다. 숨 쉴 때는 숨 쉬는 것에 열중하고, 밥 먹을 때는 밥 먹는 것에 열중하고, 사랑할 때는 사랑하는 것에만 열중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열중한 수고의 결과가 내일로 나타나며 그 결과의 열매로 또 열심히 새로운 오늘을 살아가는 바탕이 된다. 오늘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내는 것, 이것이 진실한 삶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