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려 하지마라.

세상을 바꾸려 하지마라. 세상은 인간의 힘으로 바꾸어지지 않는다. 세상은 스스로 변화할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많이 바꾸어진 듯 보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오만이고 착각일 뿐이다. 겉모습은 그렇게 보이지만 기본적이고 실제적인 것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인간이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은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히고 시끄럽게만 할 뿐이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인간들의 쓸데없는 노력은 전쟁을 발발케 했고 환경만 무차별 파괴되어 자연의 질서와 우리의 일상을 혼란하게 하고 있다.

역사 이래 많은 위인들이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였고 보기에 따라 나름 일정한 성과를 보인 듯이 기록되고 있지만 세상을 바꾸려는 그들의 노력은 모두 실패했다.

인류 문명의 탄생 이래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변화한 것은 인간과 인간을 둘려싸고 있는 삶의 겉모습일 뿐이다. 세상의 질서는 변화하지 않는다. 세상은 언제나 원래 그대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진리가 진리인 것이다.

붓다는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바꾸려고 노력하였고 자신을 바꾸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것을 스스로 실천하며 보여 주었다. 붓다의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애초부터 붓다는 시각이 밖으로 향해 있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인간 내부의 문제로 보고 스스로가 바뀌면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 갈 가능성이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세상은 연기에 의해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운행되고 있는데 인간의 어리석음이 이를 못 견디고 순리를 벗어나려는 억지 노력으로 고통의 크기만 자꾸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맹자에서 ‘순천자존역천자망(順天者存逆天者亡)’이라 하였다. ‘하늘의 진리 즉,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자는 평화롭게 존재할 것이고, 그것을 거스르는 자는 고통 속에서 망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순리에 역행하고 있는 자신을 변화시켜 세상과 일체감을 유지하고 그 흐름에 따르는 것이 세상이 변화한 것과 마찬가지가 됨을 깨달아야 한다. 과욕을 버리고 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세상의 큰 흐름에 스스로를 맡기면 더 이상 아무런 문제없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욕망과 경쟁이 치열한 현실 속에서 욕심을 내려놓고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향해 모험하고 도전하는 것이 더 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을 바꾸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신이 바뀌면 자신을 둘려 싸고 있는 상황도 변화될 수 있으며,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일과 같다.

세상과 타인은 그들 나름의 질서와 관점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므로 내가 임의로 개입하여 세상과 타인을 변화되도록 애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자신을 스스로 변화시키는 것이 더 쉽다.

자신을 바꾸는 일이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 현실의 소소한 욕심부터 내려놓을 수 있다면 자신을 바꾸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금씩이라도 스스로를 바꾸어 자신이 변화될 때 세상도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여 우리에게 아름답게 다가 올 것이다.

자신을 변화시켜 스스로를 평화롭게 하자. 스스로가 평화로운 사람은 주변을 번잡하게나 불안하게 할 연유가 없다. 내가 평화로우면 주변이 평화로울 것이고 주변이 평화로우면 세상이 평화롭게 될 것이다.

멀리서 산을 보면

멀리서 산을 보면
푸르고 넉넉한 그 품에 안기고 싶다.

그러나 정작 그 산에 안기면
푸른 산은 볼 수 없고
먼저 하늘에 가까이 가려고 다투는
무성한 나무들 뿐

멀리서 산을 보면
파란 하늘에 닿은 그 정상에 서고 싶다.
그러나 정작 그 정상에 오르면
하늘은 더 높이 달아나 있고
멀어진 하늘을 향해 애타게 소리치는
헛된 메아리 뿐

삶은 이루어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다가가는 과정이라

당첨을 기다리는 한 장의 복권처럼
바라보며 소망하는 그 순간에 의미가 있을 뿐
비록 그 곳에 닿는다 하여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닐지니…………

오쇼의 ‘금강경’

이 책의 저자 오쇼는 붓다, 간디, 네루 등과 더불어 인도의 운명을 바꾼 열 명의 인물 중의 하나 사람으로 선정되었는데 미국의 작가 탐 로빈스이 예수 이후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다.

20세기 가장 위험한 인물인 오쇼가 붓다와 금강경의 말하고 있는 책이다.

‘여시아문’, ‘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시작하는 금강경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이다.

오쇼는 붓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붓다는 아무 이념도 없다. 그는 아무런 이념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상마저 믿지 않는다. 오직 억압도 없고 이상도 없는 삶의 길을 제시한다.

붓다는 니르바나를 하나의 이상으로서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가두는 대신 해방시킨다.
어떤 목적을 위한 삶이나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 삶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해지는 삶을 가르친다. 때문에 내세나 저 세상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을 가르친다.

붓다에게는 사소한 일도 없고 큰 일도 없다.
그는 밥그릇을 들 때에도 신을 대하듯이 정중하게 대한다.  가사를 걸치거나 옷을 입을 때도 그는 매우 주의 깊다. 그는 전적으로 깨어 있다. 그는 기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오쇼는 다음과 같이 금강경을 강론하고 있다.

종교는 뗏목과 같다고 말한다, 종교는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임의적인 수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신과 세상 또한 둘이 아니다, 창조자와 창조물이 하나이다,

사회는 억눌린 마음을 창조했다. 사람들에게 성적인 쾌락을 허용하면 그들을 노예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즐거움에 넘치는 사람을 노예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회의 계략이다. 오직 슬픈 사람들만이 노예가 될 수 있다. 즐거움에 넘치는 사람은 자유인이다. 그는 스스로 독립하여 제 발로 선다.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경쟁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삶이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여기’에서 기쁨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가고 또 가고 또 간다. 그리고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언제나 가는 중일 뿐이다.

기쁨을 아는 사람은 ‘여기’에 존재한다. 그가 서울로 갈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무엇 때문에? 그는 지금 여기에서 완벽하게 행복하다. 그는 욕구(need)를 갖지만 욕망(desire)은 없다. 욕구는 만족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결코 성취될 수 없다. 욕구는 자연적인 것이지만 욕망은 변태적이다.

‘나’라는 단어는 실용적인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이 단어에 상응하는 실체는 없다.
붓다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직 구성요소들만 있을 뿐이다,  인간은 철저히 공이다.

삶을 하나의 과정이기에 삶은 고정된 물체가 아니다. 삶은 끊임없는 흐름이다.
우리의 언어에서 모든 명사는 버려야 한다고 붓다는 말한다. 오직 동사만의 진실이다.

강(river)은 진실이 아니다. ‘흐른다.(rivering)’가 진실이다. 나무(tree)는 진실이 아니다. ‘자란다.(treeing)’가 진실이다. 사랑(love)도 틀린 말이다, ‘사랑한다.(living)’가 맞는 말이다. 삶은 명사가 아니라 오직 동사로 이루어진다.

붓다는 영혼의 초월적인 힘도 부정한다. 거기에 아무 초월적인 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고 …

붓다를 여래라고도 한다.  ‘여래의 의미는 ‘그렇게 오고 그렇게 가는 자’로 해석된다. 바람처럼 오고 바람처럼 가는 자.

바람은 아무 이유없이 불어온다. 바람은 자기만의 동기를 갖고 있지 않다, 바람은 아무 목적도 없다. 바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간다, 그냥 그렇게 왔다가 그냥 그렇게 간다. 바람은 어느 곳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오고 갈 뿐이다.

붓다는 바람과 같다. 그냥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간다.
모든 것이 아름다운 축복이다. 오는 것도 축복이며 가는 것도 축복이다.  육체 안에 있는 것도 축복이며 육체를 떠나는 것도 축복이다.

오쇼는 우리의 삶도 그렇게 바람처럼 왔다가 간, 붓다의 그 삶과 다르지 않다고 이 책에서 강론하고 있다.

금강경 (벼락처럼 단번에 자르는 지혜의 완성)
오쇼 지음 | 손민규 옮김 | 태일출판사 | 2011년 09월 05일 출간

수고를 즐겨라

우리 모두는 성공을 꿈꾼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이야기하고 성공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과연 성공은 무엇인가? 성공이란 수고의 결과이다. 그 결과가 만족하고 그로 인해 행복감을 느끼면 성공한 것이다. 결국 성공은 행복해 지기 위함이고 행복은 결과의 만족도의 따라 달라진다.

사람의 만족은 쉽게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대부분 불만족이 지속되는 삶을 산다. 하나가 만족되면 또 다른 만족을 갈구하게 된다. 주변의 상황이 수시로 변하고 사람의 마음도 순간순간 변하는 것이므로 행복한 감정도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따라서 성공의 만족도가 아무리 높아도 행복은 잠시이고 새로운 성공을 향한 수고로움으로 언제나 고단할 뿐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행복을 찾기 보다는 불행하지 않음을 행복이라 생각할 수 있는 지혜로움이 필요하다.

세간의 성공지침서에도 ‘세상은 변한다. 그러므로 그 변화에 흐름을 잘 읽고 준비해야 성공한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 변화의 흐름을 읽고 준비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도 않고 한편 막연하게 들리기도 한다.

이에 대해 붓다의 가르침은 단순하다. 그냥 ‘세상이 변한다.’ 그리고 ‘나도 변하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하였다. 그리고 변화하는 매순간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수고를 다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자연스레 그 순간의 수고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이다. 성공과 행복은 도달하는 목표점이기 보다는 이루어 가는 과정이므로 그 과정의 수고를 즐기려는 지혜가 필요하다. 비록 결과가 수고한 노력의 양에 미치지 못하였다 해도 자신의 수고에 스스로 감사하고 결과의 부족함에도 만족할 줄 아는 겸손할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창세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2장 7절, 3장 19절] 하였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땀을 흘리는 수고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삶에 있어서 행복으로 구원해 줄 신도, 성공으로 인도해 줄 기적은 없다. 성공하든 실패를 하든 자신의 수고만이 계속될 뿐이다. 스스로가 수고와 결과를 어떻게 보고 무엇으로 느껴야 하는가에 따라 성공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수고의 결과를 인정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성공의 성과에 상관없이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

행복한 삶에는 자신의 수고를 놀이처럼 즐길 줄 아는 지혜로움이 필요하다.